본문 바로가기
STUDY (공부)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비평이자, 개인적인 생각들

by phd.갖고싶은자 2021. 5. 22.

동명의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감상문을 쓰고자 한다. 영화에 대한 비평과 감상을 하기에 앞서 원작 소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작품이 영화로 나오기 이전에 이미 원작 소설로부터 파생된 사회적 파장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처음 이 작품을 접한 것은 군복무 중이었던 2017년 말이었다. 그 당시에는 작품이 영화화되기 이전이라 소설로만 작품이 출간된 상태였는데, 소설책이 국군 장병들의 추천도서인 진중문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내 눈에 들 수 있었다. 그때는 휴대폰 사용도 허가되지 않았었고 토요일의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좋다고 생각해서 책을 읽게 되었다. 한편으로, 소설을 읽을 당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 하다. 남자라는 이유로 군대에 징집되어 내 인권이 가장 무시당하던 시기에 페미니즘 소설의 대표격인 책을 국군장병 추천도서로 본다는 건 어찌 보면 좀 우스우면서도, 큰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작품 외부의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넘어간다.

 

 책을 끝까지 다 보면서 내내 머리에 맴돌던 생각은 단순했다. “이게 소설인가?”. 오히려 소설의 형식이나 문학의 외형을 잠시 빌린 사례집이라고 칭하는 게 책을 설명하기 더 알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실 소설의 작품성 만을 놓고 보자면 내가 이 작품으로 비평 감상문을 쓰는 일은 없는 것이 정상이다. ‘소설로서작품에 대한 비평을 하기가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당시의 내가 느끼기로는 작품은 그저 김지영이라고 하는 불쌍한 한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온갖 시련과 성차별, 혐오와 범죄를 억지로 엮은 삶에 몰아넣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작품의 위치나 소설이 가지고 온 사회적 파장은 소설의 작품성에 비해 훨씬 컸다. 물론 이를 문제삼고자 하는게 아니다. 아무리 잘 만든 예술영화라도 소비자와 대중들에게 외면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저것 깊게 생각하지 않고 때려 부수는 식의 영화가 천만 영화가 되는 일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작품이 대중들의 어떤 요구사항을 잘 충족시키도록 영리한 전략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대중들은 어려운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생각해보면 이래저래 깊게 고민해야 하는 은유와 비유 그리고 숨막히게 들어맞는 현실성이 내포된 다큐멘터리와, 쉽고 간단하면서도 재밌는 상업영화 중에 어떤 것을 더 부담없이 시청할 수 있을지는 비교분석해보지 않더라도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굳이 나누자면 후자 편에 속하는 작품이었다. 이 전략은 책의 상업적 성공에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간결한 문체로 주인공 김지영이 당하는 성차별, 혐오 사례들은 나열해 놓았다는 점도 굉장히 영리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주인공 김지영의 삶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삶이다. 어떻게 고작 한 사람이 지구상의 모든 여성들이 겪었을 차별과 혐오를 다 겪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를 토대로 작품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사람들은 문학을 보면서 100퍼센트의 현실성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토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문학은 존재할 수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소설 안의 다양한 성차별과 혐오의 사례 중 하나라도 공감한다면 주인공인 김지영의 삶에 자신의 삶을 쉽게 투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김지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런 몰입감을 얻을 수 있도록 소설은 서술되었다. 이는 마치 최근에 대기업에서 과자를 만들어내는 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성공한 과자를 맛만 조금씩 다른 것들을 대입해 가면서 대중에게 진열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과자에 대한 수요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러이러한 점에서 작품은 비록 그 문학성을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영리하게 정략적인 성공을 할 수 있었다. 작품이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어냈고 페미니즘 문학의 상징적인 자리에 올라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이토록 성공한 원작 82년생 김지영이지만 당시 내가 판단했을 땐, 공감과 주장만 내세운 빈 껍데기 같은 작품이라는 생각했다. 이토록 균일하고, 표준화된 여성의 고통과 차별은 여성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는 있지만, 남성들을 일방적인 피의자로 몰아세워서 남성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또 다른 남녀갈등을 나을 뿐이다.

 

 원작에 대한 배경적인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영화로 넘어가 보자. 우선 영화를 볼 당시의 상황은 소설을 볼 당시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전역을 했고, 학교에 복학했으며, 여자친구가 생기고 여자친구와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굳이 이를 얘기하는 이유는 원작과 영화에 대한 내 평가가 많이 다르고 나의 상황이 여기에 일부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내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다. 영화는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을 주장하는 듯 했지만 그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줬다. 원작에서 나타난 다양한 사례들 중 일부를 취사선택했고, 억지스러운 전개를 포기하고 좀 더 부드럽고 합리적인 전개를 가져갔으며, 배우들도 감정선을 따라 훌륭하게 연기해냈다. 영화에서 82년생 김지영은 배우 정유미의 연기를 통해 때론 회유하고, 때론 울기도, 화내기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관객뿐만 아니라 남성관객에게도 일부 공감을 이끌어 냈다. 또한 공유가 연기한 남편의 역할도 컸다. 원작에 비해 그는 훨씬 착하고 다정한 남편이 되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채에 젠더 감수성 없는 말들을 내뱉는 것은 원작과 똑같지만 다른 점은 이를 자각하고 바뀌기 위해 노력하며 미안해한다는 점이다. 공유가 보여준 연기는 정말이지 좋은 남편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약간 억지스럽고, 떼를 쓴다고 느낀 장면들도 있었지만,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머리에 남았던 생각들은 이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와 인터넷을 봤더니 영화를 보지 않은 채 많은 네티즌들이 영화개봉과 배우들을 욕하는 것을 목격했다. 심지어는 영화를 개봉해서는 안된다고 국민 청원을 올리기도 했다. 물론 영화가 개봉되는 과정에서 비판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사도 여성 대표로 이루어진 신생 영화사가 제작을 맡았고 감독에도 장편영화 이력 없는 신인 여성 감독이 임명되었다. 남녀구분 프레임을 통해 수요를 창출하겠다는 속내가 어느정도 보이는 행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여성들이 맡아야 할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이를 노리고 경제적인 이익창출을 위해 경력 없는 여성으로 구성된 영화제작 팀을 만들어 낸 것이라 보는게 더 타당하다. 만약 소설만 보고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도 비슷한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보았을 것 같다. 심지어는 잘 알지도 못하고 남성 범죄자 프레임을 씌우는 영화라고 욕하기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온 입장에서는 영화를 보지 않고 마냥 욕하지 말고 비판을 해도 보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어디까지나 위에 적어 놓은 사실들은 작품 외적인 부분이고, 영화와 싸잡아서 욕한다면 영화 그 자체로부터 논점이 많이 흐려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화가 가지는 나름의 의미도 있다. 소설 원작이 이가 썩을 정도로 설탕을 들이 붓고, 불량 염료도 좀 사용해서 만든 불량사탕이라면, 영화는 나름의 공정도 갖추고, 적당히 설탕도 빼고, 포장지에도 신경을 쓴 추x춥스 같다고 할 수 있다. 여러모로 원작을 공들여서 다듬은 흔적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추파춥스로 비유한 까닭은 영화가 사회적 움직임에 대한 대변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기 보단 상업적인 목적이 더 있었을 것이라는 나의 합리적 의심을 담아내기 위해서이다.

 

 한편으로, 마냥 영화를 찬양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에서도 원작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남편을 제외한) 모든 남자들이 도구적인 존재로 그저 여성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그런 역할만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배역에서도 이를 의식한 흔적이 보인다. 배우들의 비주얼이나 언행 등등에서 공유를 제외한 모든 남자들이 그저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표현된 점이 아쉬웠다. 여성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멈춰 달라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처럼 남성을 혐오적인 존재로 표현하는 것 역시도 지양했어야 한다. 한번 남녀 차별적 프레임을 씌우게 된다면 모든 것은 남과 여로 나뉘어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부분적인 것도 일반화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처럼 여성에 대한 성차별과 혐오를 좀 더 넓은 시야에서, 혹은 다각도로 바라보지 않고 오직 남성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면 단숨에 남성과 여성이 나뉘고 피해자와 피의자 프레임이 만들어지게 될 뿐이다. 이러한 방향성은 잘못된 현실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분열, 균열, 그리고 갈등과 혐오를 낳게 된다.

 

 고작 한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적으면서 여성차별과 남녀갈등에 대해 다루는 것이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맞다. 고작 영화나 소설 한 편에서 이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 한 것처럼 그것에 대한 감상에서도 이에 대한 세태를 모두 다루거나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미 없는 감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영화 그 자체의 의미도 있었지만, 사회적 흐름에서 굉장히 중요한 축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탈 가부장제, 꼰대, 탈 권력, 남녀차별, 남녀갈등, 페미니즘 이 모든 것이 영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 잘한 점, 잘못한 점, 원작과의 공통점과 차별점, 영화의 외적인 측면 등등을 생각해보고 나라는 개인이 가지는 생각과 상황을 대입하여 정리한다면 그것이 바로 비평이 되게 된다. 비평을 통해 고립된 시각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 집단, 사회로 넘어가며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다. 그저 좋았다, 재밌었다, 슬펐다 식의 감정 나열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함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다.

 

 끝으로는 감상을 적으며 든 생각에 대해 쓰고자 한다. 페미니즘 영화에 대해 글을 쓰며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온라인 상에서 페미니즘의 만 꺼내도 개거품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쪽이든, 비판하는 쪽이든 상관없이 단어 하나에 너무 크게 과민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자인 내가 페미니즘 얘기를 꺼낸다면, 아마 사람들 사이에서 금세 이상한 소문이 돌고 흘기는 눈초리를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하지도 지지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기존의 뜻에 비해 너무나도 변형되었고,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정의가 사라진 지금의 시점에선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다만, 나는 페미니즘 보다는 우리 엄마를 생각했다. 우리 엄마 세대가 살아오면서 당해왔을 차별과 고통들. 그런 것들은 당연히 없어지고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도 가장 감정을 자극했던 사람은 정유미의 친정엄마인 미숙이었다. 그녀의 배역이 행해준 역할은 내가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곁에 있으면서도 알지 못했거나, 혹은 알더라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던 차별들을 마주하게 해준 것이다. 내가 그 차별과 아픔을 응시했을 때 가장 큰 공감과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미정에게서 우리 엄마가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엄마와 같은 세대가 누린 고통을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느끼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뿐이다. 나는 그 어떤 사상적 지지나 비판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댓글